메디칼산업
'백신주권' 없는 한국, 그날의 혼란 반복하지 않으려면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한국이 가장 크게 흔들린 순간은 확진자 급증이 아니라, 백신 도입이 늦어지던 시기였다. 세계 주요 선진국들이 자국에서 생산한 백신으로 접종 일정을 앞당기는 동안, 한국은 물량이 제때 들어오지 않아 접종 계획을 여러 차례 조정해야만 했다. 정부는 1회분에 수십 달러에 달하는 백신을 사기 위해 밤낮없이 글로벌 제약사와 협상했고, 국민들은 매일 뉴스를 확인하며 '언제 맞을 수 있나'를 걱정했다. 세계적인 방역 모범국이었지만, 백신만큼은 끝내 수입 의존국이라는 현실을 피하지 못한 셈이다. 더 뼈아픈 지점은 세계보건기구(WHO)가 팬데믹 종료를 선언한 지 2년 6개월이 지났지만 한국이 아직도 mRNA 백신을 개발하지 못해 '백신 주권'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다가는 다음 팬데믹이 닥쳤을 때도 해외 의존이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질병관리청이 최근 공공백신 개발과 mRNA 백신 플랫폼 구축에 팔을 걷어붙인 배경도 여기에 있다. 감염병이 유행할 때마다 세계 각국이 백신 확보 전쟁을 치르는 현실에서, 백신을 스스로 개발해 공급할 수 있는 역량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국가 안보의 문제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두창·엠폭스처럼 생물테러 가능성이 있는 감염병, 군부대 집단발병이 우려되는 아데노바이러스, 국내 부담이 큰 결핵과 중증열성혈소판감소증후군(SFTS) 같은 백신들은 시장성이 크지 않아 민간 기업이 선뜻 뛰어들기 어렵다는 점도 정부의 '마지막 보루' 역할에 힘을 실었다. 질병청 국립보건연구원이 2022년부터 추진 중인 공공백신개발지원사업은 이러한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국가 주도 프로그램이다. 이 사업은 총 491억원을 투입해 생물테러·안보 관련 감염병(두창·엠폭스 등), 미해결 감염병(결핵·SFTS 등), 미래 고위험 감염병(라사열·니파·치쿤구니아·뎅기열 등)을 대상으로 백신 후보 물질을 발굴하고 비임상·임상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생물안전 3등급(BL3) 시설과 고위험 병원체 연구시설, 동물실험실, 임상검체분석기관(GCLP) 등 민간이 구축하기 어려운 고난도 인프라도 국가가 직접 운영한다. 이렇게 생산된 후보물질과 평가 자료는 다시 민간 기업에 제공해 실용화를 돕는 구조다. 정부는 한발 더 나아가 '팬데믹 대비 mRNA 백신개발지원사업'을 별도로 띄웠다. 목표는 미래 팬데믹이 발생했을 때 100∼200일 안에 자체 mRNA 백신을 개발할 수 있는 플랫폼을 완성하겠다는 것이다. 2025년부터 2028년까지 총 5천52억원(국비 3천379억원, 민간 1천673억원)을 투입해 핵심 기술 보유기관 4곳을 중심으로 비임상부터 임상 3상까지 전 주기를 패키지로 지원한다. 코로나19 대상 국산 mRNA 백신의 품목허가까지 마쳐 플랫폼 자체를 완성하겠다는 구상이다. 이미 사업은 속도를 내고 있다. 올해 4월 비임상 과제가 시작된 이후 각 기관은 백신 성능을 높이기 위한 기본 설계를 다듬고, mRNA를 몸속에 잘 전달하기 위한 입자 기술도 개선하고 있다. 또 자체 또는 위탁 생산시설을 활용해 실제 실험에 사용할 시료를 생산하는 작업도 진행 중이다. 녹십자와 유바이오로직스, 한국BMI, 레모넥스 등은 식품의약품안전처에 임상시험계획(IND)을 제출했고, 질병청은 규제 사전상담, 대조백신 제공, 최신 변이 바이러스 분양, 검체 분석 네트워크 구축 등을 통해 임상 진입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연구비만 나눠주는 방식이 아니라 기술·규제·재정 지원을 한 번에 풀어주는 '패키지 지원'에 가깝다. 이런 움직임은 최근 열린 감염병 백신 연구개발 성과교류회와 '백신 개발 임상 지원 설명회'에도 그대로 반영돼 있다. 이 자리에서는 인공지능(AI)을 활용한 백신 항원 최적화, 자가증폭 RNA 기반 인수공통감염병 백신 개발, SFTS·신증후군출혈열 백신 비임상 연구, 니파·치쿤구니아 바이러스 백신 후보 개발 등 그간의 연구 성과가 공개됐고, 임상시험 검체 분석기관과 감염병 임상시험 네트워크를 통한 협력 전략도 공유했다. 연구실 안에서 끝나는 논문 성과가 아니라, 실제 백신 제품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연결 고리를 정부가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힌다. 그러나 공공이 나섰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mRNA 백신은 항원 설계부터 핵심 서열 안정화, 전달체, 대량 생산 공정에 이르는 전 과정이 고난도 기술로 얽혀 있다. 일부 요소 기술은 여전히 해외 특허와 장벽에 가로막혀 있고, 이를 우회하거나 대체할 국산 기술을 확보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고위험 병원체를 다루고 임상시험을 설계할 수 있는 전문 인력도 충분하지 않고, 대규모 임상을 수행할 수 있는 국내 인프라 역시 제한적이다. 국산 백신의 상용화를 위해서는 기업이 장기간 투자할 수 있도록 정부가 일정 수준의 '예측 가능한 시장'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지적도 뒤따른다. 그런데도 지금의 변화는 백신 주권을 확보하기 위한 중요한 출발점이다. 코로나19는 백신을 가진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의 격차가 접종률만이 아니라 경제·사회적 피해 규모까지 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줬다 백신은 이제 단순한 보건의료 제품이 아니라 국가 전략 자산이다. 공공백신개발지원사업과 mRNA 백신개발지원사업은 우리 스스로 감염병으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일상을 지켜내기 위한 최소한의 방파제를 쌓는 작업이다. 감염병 발생 후 최대 200일 안에 국산 mRNA 백신을 개발할 수 있는 날이 올지, 팬데믹 때 외국 백신 도입 일정표를 쫓던 기억을 역사의 뒷장에 넘길 수 있을지, 앞으로 몇 년이 한국 백신 주권의 성패를 가를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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