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에서 응급실 파행 운영이 잇따르는 가운데 응급실 근무 의사를 구하기 위한 '구인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일부 병원에서는 연봉 4억원을 내걸고도 응급의학과 전문의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고, 더 높은 연봉을 제시하는 병원으로 이직하는 의사들도 잇따르고 있다.
지역에서 근무하던 응급의학 전문의들은 좀 더 나은 조건을 좇아 수도권으로 이동하고 있다. 전공의 집단사직으로 인한 의료공백의 장기화가 지역 응급의료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온다.
◇ '귀한 몸' 응급의학과 전문의…연봉 4억원 내걸어도 못 구해
국립중앙의료원은 이날 계약직 응급의학과 전문의 3명을 긴급 채용하는 재공고를 내고 오는 13일까지 원서를 받기로 했다.
연봉은 4억원이며, 계약 기간은 내년 말까지다.
국립중앙의료원은 올해 들어 응급의학과 전문의 채용 공고를 여러 차례 게재하면서 구인난을 드러냈다.
지난 7월부터는 아예 채용 공고문에 연봉을 4억원으로 못박으며 구인하는 중이다.
당시 공고는 이달 초 마감됐으나, 재공고가 올라온 점으로 미뤄 사실상 충원이 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역 의료기관의 상황도 좋지 않다.
세종충남대병원은 인력 부족으로 응급실 야간진료를 중단한 후 응급의학과 전문의 채용에 공을 들이고 있으나, 연봉 등 조건이 맞지 않아 난항을 겪고 있다.
이 병원 응급의료센터는 애초 교수 3명과 촉탁의(계약직) 12명 등 15명으로 운영되다가 최근 교수 1명, 촉탁의 3명이 사직한 데 이어 9월 1일 자로 촉탁의 4명이 추가로 사직했다.
세종충남대병원의 기존 응급의학과 전문의 연봉은 3억5천만원 수준이었으나, 인근 대형병원에서 4억원이 넘는 연봉을 제시하면서 사직이 잇따른 것으로 전해졌다.
건국대충주병원 측은 응급의학과 전문의 7명 전원이 사직서를 낸 뒤 이들에게 연봉 인상을 제시했으나, 이 가운데 2명만 이를 받아들이고 잔류를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병원을 떠난 5명 중 2명은 서울의 대형병원에 이직을 했거나 준비 중이고, 나머지 3명은 쉬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아주대병원은 성인 환자를 담당하는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기존 14명에서 11명으로 줄어든 상황이다.
최근 이들 가운데 4명이 사의를 밝혔으나, 병원 측의 설득 끝에 사직을 보류하고 업무를 이어가기로 했다.
◇ 지역 응급의학 전문의, 수도권으로 이동…"지역 응급의료 위기"
응급의학과 전문의들의 사직과 이직이 잇따르면서 수도권과 지역병원 간 '인력 불균형'도 심각해지는 모양새다.
전체 응급의학과 전문의 규모가 그대로인데도 현장에서 시름겨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국 응급의료센터에서 근무하는 응급의학과 전문의는 지난달 21일 기준 1천484명으로, 지난해 4분기 1천418명에 비해 66명 늘어나는 등 큰 변화가 없다.
하지만 근무 여건이 좋지 않은 공공병원이나 지역병원을 중심으로 사직이 잇따르는 탓에 지역에서부터 응급의료 파행이 현실화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강원대병원은 최근 2년간 16차례에 걸쳐 응급실에서 근무할 의사를 채용 중이며, 지금도 7월부터 6명 모집 공고를 내 지원을 받고 있다.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아니어도 응시가 가능하도록 요건을 대폭 완화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채용이 어려운 이유에 대해 강원대병원은 높은 업무강도와 소송 부담 등 응급의학과 진료과목의 특성 외에 '지역'이라는 한계가 있는 것으로 본다.
실제로 지난 7월 강원 속초의료원에서 사직한 응급의학과 전문의 2명은 각각 수도권 대형병원으로 자리를 옮긴 바 있다.
수도권의 한 응급의학과 교수 A씨는 "응급의학과 전문의는 원래 진료하던 환자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평소에도 이직이 잦은 편"이라며 "최근에는 응급의료센터들이 서로 인력을 뺏어오고 있는데, 의사들도 근무에 대한 부담이 적고 처우가 좋은 쪽으로 옮겨 갈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하지 않으냐"고 말했다.
◇ 전공의 집단사직에 응급실 인력 73%로 줄어…'배후진료'도 위기
의료계에서는 지난 2월 전공의들의 집단사직으로 누적된 응급의학과 전문의들의 피로가 한계에 다다랐다고 본다.
수도권의 한 종합병원급 의료기관 응급실의 경우 통상 응급의학과 전문의 1∼2명과 레지던트 2∼3명, 인턴 2명 등 의사 5∼7명이 근무하는 구조였으나, 전공의들의 사직 후 현재 전문의만 남아있다.
진료지원(PA) 간호사들이 보조하더라도 이들은 진료하거나 처방을 할 수가 없어 실질적인 업무를 나눠지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전문의 숫자는 변함없더라도 응급실에 내원하는 환자를 전부 받을 수 없는 이유다.
전공의 집단사직 후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전문의, 일반의, 전공의를 포함한 전체 의사 인력은 평시 대비 73.4%에 그치는 것으로 파악된다.
전국 응급의료센터에 근무하는 응급의학과 레지던트는 지난해 4분기 591명에서 지난달 21일 기준 54명으로 무려 537명 줄었으며, 일반의 및 인턴은 243명에서 35명으로 188명 급감했다.
과도한 업무 부담에 사직을 고려하는 응급의학과 전문의도 나날이 늘어나는 분위기다.
문제는 한명의 사직이 응급실 전체의 공백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서울의 한 응급의학과 전문의 B씨는 "요새 사직을 고민하는 응급의학과 의사들이 늘어난 건 사실이고, 나도 더 이상 이렇게는 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며 "특히 응급실은 한명이 나가면 그만큼 일이 힘들어져 이제 (의사들이) 줄줄이 나가면서 현장이 무너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응급의학과 자체의 업무 강도가 높다 보니 아무리 고연봉을 제시해도 쉽게 인력을 충원하기 어렵고, 더욱이 지역의 경우 근무는 물론 정주 여건도 좋지 않은 편이어서 구인난이 지속할 수밖에 없다.
의료계에서 끊임없이 언급하는 '배후진료 위기'도 문제다.
배후진료는 응급실에서 처치한 환자를 병원 내에서 후속 진료하거나 수술하는 것을 말한다.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응급의학과 전문의 수가 그대로 유지되더라도, 환자를 받아서 수술할 수 없는 현 상황이 지속하는 한 응급의료 대란은 해소될 수 없다는 것이다.
B씨는 "배후진료를 맡는 교수들도 전공의 없이 외래진료에 수술까지 하고 있기 때문에, 당장 응급실에 내려와서 환자를 보라고 강요할 수도 없다"며 "지금처럼 응급실에서 환자를 강제로 받으라는 식의 대책은 사직만 유도하고 악순환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