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에서 음식은 수행자의 육신을 지켜주는 최소한의 자양이자, 약이다. 음식의 맛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금물이다. 그런데 왜 세계 유명 셰프들은 '절밥'이라고 하는 한국의 사찰음식을 배우고 싶어 할까. 그 이유를 사찰음식의 장인 여거스님을 찾아가 알아봤다.
◇ 마음과 정신을 채우는 수행
경기 수원시 광교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비구니 사찰 봉녕사.
음식을 가르치는 교육관인 '금비라' 1층 내부 벽면에 커다란 글귀가 눈에 띈다.
스님들이 공양(供養)하기 전에 외우는 게송인 '오관게'를 해석한 글이다.
음식이 나올 때까지의 과정에 담긴 은혜에 대한 감사와 공경의 정신을 나타낸다.
공양은 단순히 배만 불리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마음을 채우는 수행의 과정이다.
◇ 직접 키운 것들과 천연 조미료들의 향연
교육관 1층에 들어서자 검은 뿔테 안경을 이마 위로 올리고 선보일 음식 준비에 바쁜 여거스님이 취재팀을 반갑게 맞는다. 4인 1조로 40여명이 조리 실습하는 시설을 갖춘 이곳은 마치 넷플릭스의 요리 경연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스튜디오 같은 느낌이다. 용인 극락사의 주지인 여거스님은 24년째 사찰음식을 강의하고 있다. 스님은 극락사 옆 조그마한 밭에서 다양한 작물을 농사짓는다. 스님이 "한꺼번에 달려들자"라고 말하자 조교팀 4명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나물 한 움큼이 달궈진 프라이팬에 올라가더니 이내 고소한 냄새가 진동한다. 비름나물이다. 직접 농사를 지어 여름철에 채취한 뒤 말려뒀다가 간장과 들기름으로 밑간했다. 들기름은 스님이 애용하는 재료 중 하나다. 넉넉하게 들어가야 맛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음식을 하다가 도저히 맛이 안 난다 싶으면 그때 사용하는'한 수'는 들깻가루다. 이 또한 들기름의 원료다. 비름나물은 생김새는 수수하고 들풀처럼 흔하지만 예부터 오래 살게 한다는 뜻으로 '장명채'(長命菜)라고 불리기도 했다. 삶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스님이 말한다. 너무 오래 삶으면 물러진단다.
비름나물을 볶은 뒤 눈에 익숙한(?) 것이 한 접시 등장했다.
횟집에서 많이 봤기에 "멍게가 있네요?"라고 말하자 스님은 웃음을 감추지 못한다. 흔히 '늙은호박'이라고 하는 청둥호박으로 만든 호박꼬지였다. 농사지은 청둥호박의 속을 파내고 잘라서 말린 뒤 물에다 불린 것이다. 언뜻 보면 얼렸다 녹인 멍게와 흡사하다. 그 자체로 굉장히 단맛이 났다. 스님은 아무것도 넣지 않고 들기름만 두른다. 자른 호박은 빨랫줄에 걸어서 말린단다. 바람도 통하고 잘 마를 것 같다.
이어 향을 지키기 위해 소금을 치지 않은 더덕 유자청 버무림이 만들어진다. 더덕을 적당히 두들긴 다음 먹기 좋은 크기로 찢어 유자청을 가미하고 청포도를 반으로 잘라 살짝 올린다. 한젓가락 해보니 더덕과 유자의 향이 어우러져 상큼하기 그지없다. 스님은 2024년 일본 오사카에서 한국문화원 행사 때 이 음식을 선보였는데, 현지인들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고 한다.
일반 식당에서 흔한 배추겉절이도 나왔다. 제철을 맞은 세발나물과 파프리카, 홍시가 앙증맞게 곁들여진다. 그런데 위에 뿌리는 새콤한 향의 무언가는 생소하다. 다시마 식초였다. 감칠맛을 돋운다. 두꺼운 건다시마에 현미식초와 설탕을 넣어서 1년간 숙성시킨 것이다. 여름에는 물에 희석해 음용하기도 한단다. 장 만들기와 함께 다양한 식초 만들기는 교육관에서 스님이 가르치는 핵심 과정이다.
통상 '메인 메뉴'를 먹기 전에 식욕을 돋우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샐러드다. 스님이 내세운 것은 귤청양배추 버무리였다. 귤청은 처음 봤다. 유기농 귤을 껍질째 갈아서 설탕을 재워 발효시켰다고 한다. 유자청은 숙성시키면 향이 강해지는데, 귤청은 은은하고 달콤하다. 스님이 아침에 가장 즐기는 음식이라고 한다.
드디어 스님의 대표 음식인 백김치 국수가 모습을 드러낸다. 백김치는 보관해뒀다가 약간 신맛이 날 때 꺼낸다. 돌산갓과 무, 배즙, 곶감이 들어가고 다시마 식초가 곁들여진다. 돌산갓은 향을 내기 위한 것이다. 곶감은 적당히 말린 반건시를 잘라 넣는다. 국수를 넣으면 싱거워지기 때문에 소금을 약간 넣는다. 마지막으로 3년간 숙성시킨 매실청을 가미한다. 백김치 국물을 한 숟가락 떴다. "육수가 멋진데요"라고 말했다가 이내 실수임을 깨달았다. 사찰에서 고기를 우린 국물은 없다.
한쪽에서 대추와 들깨를 넣은 밥이 다 되자, 건다시마와 건표고버섯 우린 물로 냉이 된장찌개를 끓인다. 표고버섯을 말린 건표고는 생표고보다 영양가가 4배 많다. 스님은 호박을 칼로 자르지 않고 계량스푼으로 일일이 한술씩 뗀다. 모양을 각기 다르게 해 식감을 다양하게 하기 위해서다. 담근 된장을 한 젓가락 입에 넣었더니 짠맛은 전혀 없고 달곰한 맛이 감돈다.
스님은 직접 띄운 청국장에 삶은 애호박을 올리고 조청과 매실, 참기름을 두른 청국장 애호박 버무리를 만들고 조교들은 산에서 주운 도토리와 미나리로 조그마한 전을 부친다. 이어 토마토 속을 파내 가지와 피망 등을 채워서 찐 토마토 찜이 완성된 뒤 스님은 "우리가 안 한 게 뭐가 있지요?"라고 조교들에게 묻는다. 2시간여만에 그렇게 웰빙 식단이 차려졌다.
◇ 발우공양, 그 귀한 경험
이왕이면 공양하고 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스님이 권유한다. 은근히 발우공양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 요청하니 한 상을 만들어준다. 발우는 스님들이 식사할 때 사용하는 식기를 일컫는다. 바리때라고도 한다.
들깨밥 위에 비름나물 등을 올리고 고추장으로 비비면서 여기저기 정신없이 젓가락을 대다가 청량한 맛이 나는 무언가를 씹었다. 멜론과 산초가 들어간 장아찌다. 입안을 정화한다고나 할까. 조금 전에 먹은 음식이 뭐였는지 잊게 하는 독특한 식감이다. 장아찌는 사찰의 대표적인 저장 음식이다. 접시를 죄다 비워갈 즈음 백김치 국수 국물이 입안을 싹 정리해준다. 허기를 채우는 것에 함몰돼 오관게의 정신을 되새길 틈이 없었다.
식사 뒤 발우를 씻으려 하자 "놔두세요"라며 스님이 만류한다. 귀한 발우를 수세미로 씻다가 흠집을 내는 경우가 많아서다. 사찰에서 스님들이 공양을 마치고 발우에 물을 부어 김치 한쪽으로 닦은 뒤 그 물을 마시는 모습을 봤다면 이해할 수 있다.
◇ 세계 유명 셰프들에게 전수하다
여거스님은 오는 4월과 10월 프랑스 파리와 영국 런던 등지의 세계적 요리 아카데미 채식가 과정에 강사로 초청받아 사찰음식을 전수할 예정이다. 동양 음식 중에서도 한국의 사찰음식 전문가가 되고 싶어 하는 현지의 유명 셰프들이 많다. 스님은 일본 등 아시아권의 사찰과 음식 교류도 자주 했다.
봉녕사 사찰음식교육관은 2013년 개관했다. 작년 한 해 배출한 수강생만 1천250명이다. 2009년부터는 매년 사찰음식대향연을 개최하고 있다. 여러 불교권 국가의 사찰음식을 맛보고 명장들의 강의도 들을 수 있다. 봉녕사는 현대 불교계 거목인 청담스님의 속가 딸 묘엄(1932~2011)스님이 승가대학을 설립하고 비구니 승단의 발전을 선도한 곳이다. 주불전인 대적광전과 도서관인 소요삼장에는 묘엄스님의 대형 사진이 걸려있다. 묘엄스님은 제자들과 배추 농사도 짓고 온갖 작물도 키웠다. 여거스님은 묘엄스님의 손주 상좌(속가에서 손녀의 의미)다. 묘엄스님은 먹는 것이 수행과 직결돼있다고 말하고, 이에 대한 계율을 철저히 지켰다고 여거스님은 회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