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불덩이인데 해열제 하나를 구하려 약국 수십 곳을 헤매던 '그날'의 기억. 발암물질이 나왔다며 나라가 발칵 뒤집힌 고혈압약(발사르탄) 사태. 약을 구하려, 혹은 바꾸려 병원과 약국을 전전해야 했던 '약국 순례'는 이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고통이 됐다.
최근 이 문제가 또다시 불거졌다.
약이 없어 벌어지는 국민적 고통을 막겠다며 정부와 약사회가 '필수·품절약'에 한해 '성분명 처방'을 도입하자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러자 의료계는 어김없이 "국민 안전을 위협한다"며 결사반대를 외치고 있다. 2000년 의약분업 이후 25년째다.
도대체 왜 이들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싸우는 걸까. 그리고 이 지긋지긋한 싸움에서, 정작 그 처방전의 주인인 '나', 환자는 어디에 있는 걸까?
의사들은 주성분이 같아도 첨가물이나 제조 공법에 따라 약효가 미세하게 다를 수 있고, 그 치료의 최종 책임은 의사가 지니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상품'을 처방할 권한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약사들은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의 엄격한 생물학적동등성(생동성) 시험을 통과한 약(제네릭)은 오리지널과 효과와 안전성이 동일하다고 맞선다.
성분명으로 처방하면 약국에 특정 약이 없어도 환자가 바로 다른 약을 받을 수 있고, 더 저렴한 약을 선택할 수도 있으며, 고질적인 리베이트 고리도 끊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양쪽 다 '국민 건강'을 말하지만, 25년간 이 사안을 지켜본 국민의 눈에는 각자의 '밥그릇'이 걸린 현실적인 문제로 더 크게 보인다.
의사들의 제네릭 불신은 과연 100% 순수한 '환자 안전' 때문일까? 특정 상품명 처방을 통해 유지되는 제약사와의 관계나 '처방권'이라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방어막은 아닐까.
약사들이 내세우는 '국민 편익'과 '재정 절감'은 또 어떤가. '약 자판기'로 전락했던 위상을 되찾고 약물 관리 상담료 등 새로운 '밥그릇'을 확보하려는 의도는 없을까.
성분명 처방이 도입되면 리베이트가 의사에서 약사로 옮겨갈 뿐이라는 의료계의 비판에 그들은 명쾌한 답을 내놓은 적이 있던가.
이 싸움에서 가장 큰 책임은 정부에 있다. 25년간 갈등을 중재하고 제도를 개선할 1차 책임자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발사르탄 사태'나 '코로나 품절 대란'을 겪고서야 부랴부랴 '제한적 성분명 처방' 카드를 꺼냈다.
이는 의사-약사 양대 직역 단체의 눈치만 보며 "사회적 합의가 우선"이라는 말 뒤에 숨어 책임을 회피해 온 결과다.
국민의 생명이 달린 문제를, 두 집단의 힘겨루기 속에 방치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 이 소모적인 '그들만의 리그'를 끝내야 한다. 해법은 '신념'이나 '밥그릇'이 아닌, 객관적인 '데이터'가 말하게 하는 것이다.
첫째, 제네릭 '품질 데이터'를 전부 공개해야 한다. "믿을 수 있다, 없다"는 말싸움을 끝내야 한다. 미국 식품의약청(FDA)의 '오렌지북'처럼, 국내 모든 제네릭 의약품의 품질 평가 등급(예: A등급-동등함)을 매겨 국민 누구나 쉽게 보게 하자.
둘째, 제약사의 '지출 보고서'를 전면 공개해야 한다. 'K-선샤인 액트'에 따라 제약사가 의사에게 제공한 강연료 등을 국민에게 100% 공개해야 한다. 내가 처방받은 약의 의사가 그 약을 만든 제약회사에서 얼마를 받았는지 환자가 직접 확인할 수 있게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리베이트라는 검은 그림자를 없앨 유일한 '햇볕'이다.
셋째, '환자'를 논의의 중심에 세워야 한다. 처방전의 진짜 주인은 환자다. 의약품 공급을 논의하는 모든 위원회에 환자·소비자 단체가 동등한 주체로 참여해야 한다.
'약 품절 대란'은 우리 시스템의 가장 약한 고리가 터져 나온 고통스러운 신호였다. 이제 그 처방전의 진짜 주인인 국민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
"내 약의 품질 정보와 가격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십시오."
이 상식적인 요구가 25년 묵은 전쟁을 끝낼 유일한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