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시대를 연 핵심 기술인 그래픽처리장치(GPU) 기반 학습 아이디어가 한국 연구실에서 처음 태동한 것으로 확인됐다. 22년 전인 2004년 숭실대 연구진이 처음으로 GPU를 이용해 신경망 연산을 구현하며 최대 30배 속도 향상을 입증한 것으로, 엔비디아가 범용 GPU 연산 플랫폼 '쿠다'(CUDA)를 2007년 내놓기보다 3년 앞선 성과다. 16일 과학기술계에 따르면 오경수·정기철 숭실대 미디어학부 교수가 2004년 국제학술지 '패턴 인식'에 발표한 'GPU를 이용한 신경망 구현' 논문은 세계 최초로 GPU를 신경망 연산에 적용한 사례로 평가된다. 당시 GPU는 게임 화면의 픽셀을 빠르게 그리는 장치 정도로 여겨졌지만, 점차 성능이 좋아지며 타 분야 확장 가능성이 탐색되던 시기다. 두 교수는 GPU의 병렬 처리 특성이 이를 오늘날 딥러닝(심층학습)의 구심이 된 신경망에 맞아떨어진다는 점에 주목해 연구를 진행했다. 이어 연구를 패턴 인식과 국내 학술지인 정보처리학회논문지-B에 각각 발표했다. 이들의 성과는 학계에서는 간헐적으로 언급돼 왔지만, 제프 딘 구글 수석과학자가 2022년 미국 예술과학아카데미 학술지 '디아달로스'에 딥러닝 구현에 GPU를 활용하는 초기 시도로 소개하며 대중에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두 교수는 인터뷰에서 "세부적 구현 방식은 쿠다 사용 전이라 다르지만, 작동 원리는 현재의 딥러닝과 동일하다"고 설명했다. 이 아이디어는 게임 분야 전문가인 오 교수와 신경망 분야 전문가인 정 교수가 2003년 융합 학과인 미디어학부에 함께 임용돼 6개월간 임시로 한 연구실을 쓰면서 탄생했다. GPU를 다루던 오 교수가 기술적 특성을 설명하자, 신경망을 전공한 정 교수가 이 분야에 딱 맞아떨어진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정 교수는 "당시 논문을 쓸 때도 사전 연구를 많이 조사했는데 (관련 아이디어가) 전혀 없었다"며 "신경망에 썼던 데이터 병렬성을 그대로 GPU로 옮길 수 있어 너무 딱 맞는 하드웨어였고 알고리즘이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논문에도 "비록 그래픽스 하드웨어가 신경망 구현을 위한 전용 하드웨어는 아니더라도 이미 일반인에게 많이 보급된 장비"라며 "가격이 저렴하고, 구현할 때 오버헤드가 적어서 대용량 패턴인식이나 영상처리 등의 문제에 적용될 때 많은 장점이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의기투합한 두 교수는 연구도 순식간에 진행해 수 주 만에 연구를 마쳤고, 논문도 투고 일주일만 게재 승인을 받을 정도로 순조로웠다고 회고했다. GPU도 엔비디아가 아닌 당시 가장 성능이 좋았던 ATI의 라데온을 활용했다. 첫 논문에서는 라데온 9700 PRO를 활용해 연산속도를 20배 높였고, 수개월 후 국내에 낸 논문에서는 라데온 9800 XT를 써 30배까지 높였다. 연산 속도에서 성과를 거뒀지만, 데이터 이동 속도가 병목으로 작용해 이를 지원하는 지원하는 메모리의 필요성도 느꼈다고 이들은 덧붙였다. 고대역폭 메모리(HBM) 같은 고속 메모리의 존재 필요성도 연구에서 엿본 셈이다. 시대를 앞서 나간 연구지만 당시는 AI에 대한 회의론이 클 때였고 신경망이 주목받던 시기도 아니라 후속 연구로 이어지지는 못했다고 이들은 밝혔다. 정 교수는 "당시에는 신경망 크기도 작았고 활용 데이터도 많지 않았다"며 "GPU를 이용한 신경망이 지금처럼 이렇게 크게 성장할지는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오 교수는 "쿠다 전에는 응용 프로그램 인터페이스(API)로 신경망을 해석한 거라 구현이 까다로웠고 불편함이 있었다"며 "쿠다가 나오면서 전문가나 새로 시작하는 사람이나 똑같아지면서 불리해졌다"고 말했다. 초임 교수였던 이들이 뚝심 있게 연구를 이어가기에도 현실적 제약이 컸다. 정 교수는 "신임 교수니 연구실을 꾸리려면 연구비가 필요하고, 정부 과제나 기업 과제처럼 연구비를 주는 건 다 한 것 같다"며 "한 주제를 꾸준히 갔어야 했는데 환경 탓은 아니고, 제가 선택을 잘못한 것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이들은 연구가 이어지지 못한 건 아쉽지만, GPU가 신경망에 적용 가능한 걸 보여 AI 발전에 일조했다는 자부심은 있다고 했다. 정 교수는 쿠다가 나오기 전 엔비디아의 국내 콘퍼런스에도 초청돼 발표하기도 했다며 "논문 제목이 너무 명확해서 다른 이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측면은 많았을 것 같다"고 회고했다. 오 교수는 "과거에는 아이디어가 중요했지만, 지금은 데이터 확보와 컴퓨터 성능이 중요해진 시기가 됐다"며 "한국도 잘하고 있지만, 고급 인력이 공학 분야에 많이 올 수 있도록 지원도 되고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분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